브라이언 오서 코치를 만나고 나서는 아예 경쟁심 자체를 놓아버렸다. 오서 코치는 처음 김연아를 맡았을 때 특이하게도, 고난이도 테크닉에 집중하는 대신 피겨를 피겨 자체로 즐기는 법,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피겨 여왕 김연아가 드디어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피겨에 1g의 관심도 없는 나 같은 사람까지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 모은 그녀의 연기는 숨 막힐 듯 아름답고 가슴 터질 듯 감동적이었다. 사람들은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김연아를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과 라이벌 구도에 놓인 ‘인간’ 아사다 마오의 불운을 측은하게 여기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김연아에게도 아사다 마오가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젠 거의 포기다. 주니어도 모자라 시니어까지. 정말 오늘은 밉다. 왜 자꾸 내 앞길을 가로막는 거야. 그래 너 일등 먹어라. 난 네 꼬랑지만 붙어다닐게.” 4년 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적은 김연아의 글이다. 열여섯 살 소녀는 자기를 제치고 늘 1등을 하는 경쟁자가 적지 않게 원망스러웠던 모양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2007년 일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한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의 태도다.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사람은 바로 나다’라는 OX 퀴즈에서 아사다 마오는 O를, 김연아는 망설이다가 X를 들었다.
어릴 적부터 올림픽 금메달만을 꿈꾸며 달려온 마오와 달리 김연아에게 마오는 금메달 이전에 넘어야 할 벽이었던 모양이다. 사회자가 왜 금메달을 못 딸 것 같으냐고 묻자 김연아는 “그건 그때 가봐야 아는 일”이라고 조심스러워하면서 사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마오의 유연성이 너무 부럽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의 금메달은 김연아에게 돌아갔다. 그것도 마오와의 점수 차를 20점 이상 따돌리면서.
버리고 그만두는
뺄셈의 성공 법칙
우아함, 대담함, 완성도…. 전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하듯 김연아가 금메달을 딴 이유를 대라면 수만 가지는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오늘날의 ‘피겨 여제’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누구보다 치열한 ‘그만두는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김연아는 미셸 콴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위해 학업을 따라가는 것도, 평범한 여학생으로서의 삶도 ‘그만두었다’. 그래, 이런 선택은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거쳐야 하는 과정일 수 있으니 그러려니 하자.
그러나 그녀의 ‘그만두기’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고 나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라이벌 아사다 마오를 넘어서기 위해 트리플 악셀이라는 고난이도 테크닉에 목숨 거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충실했다.
어머니 박미희 씨는 “아사다 마오는 트리플 악셀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적으로 뛰어나지만 점프에서 약간 규칙에 어긋난 습관이 있어서 애를 먹는다. 연아는 처음부터 현란한 기술보다는 정확하게 점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최근 규정이 까다로워지면서 연아의 점프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를 만나고 나서는 아예 경쟁심 자체를 놓아버렸다. 오서 코치는 처음 김연아를 맡았을 때 특이하게도, 고난이도 테크닉에 집중하는 대신 피겨를 피겨 자체로 즐기는 법,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번 올림픽 쇼트 프로그램에서 김연아는 아사다 마오의 완벽한 연기 뒤에도 한 치의 동요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의 연기에만 몰입했다. 은메달에 머문 아사다 마오가 다음번엔 4회전 점프에 도전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김연아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선수가 되고 싶어 한다.
현란하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김연아의 연기를 보면서 아차 싶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채우는 데만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지나친 욕심으로, 혹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필요 이상의 물건을 구입하고, 하지 않아도 될 일 속에 파묻혀 정작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 나태했던 것은 아닐까.
생텍쥐페리는 “완벽함이란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걷어낼 것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현대인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유는 길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길이 너무 많아서라는 지적이 있다. 우리의 삶이 이토록 피폐한 이유는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헛된 ‘욕망’과 ‘야망’을 좇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족한 것이 거의 없는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오히려 삶의 풍요를 누리기 어려운 역설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풍요 속의 빈곤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하기, 소유하기, 획득하기, 쟁취하기, 채우기가 아니라 빼기, 나누기, 버리기, 비우기, 그만두기의 철학, 바로 ‘뺄셈의 성공 법칙’인지도 모른다.
버리고 버리다 보면 본질이 드러난다. 본질을 잡아야 뇌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완벽하게 통합된다. 성공하는 사람은 그 본질을 잡은 사람이다. 그래서 김연아는 금메달과 상관없이 이미 충분히 승자다.
글·전채연 ccyy74@brainmedia.co.kr | 사진제공· <7분 드라마> 중앙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