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만 남은 국내성, 고구려 500년 도읍지

성벽만 남은 국내성, 고구려 500년 도읍지

중국 속 우리 역사 탐방 8

집안 환도산성 오른편으로 고구려 고분군이 있다. 안내문에는 산성하귀족묘(山城下貴族墓)라고 하였다. 고구려   당시 귀족층의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산성하 고분군이라 하기도 하는데 도읍인 국내성과 환도성 사이에 무덤을 만들 정도라면 귀한 신분이었을 것이다. 이 고분군은 4세기 이후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십 개 고분이 서열대로 배치되어 있고 작은 무덤도 여러 곳에 있다. 돌무지무덤(적석묘). 계단식적석묘, 봉토벽화묘 등 종류가 다양하다. 적석묘는 3~4세기 고구려 묘제라고 한다. 안내문에는 4세기 이후 이 고분군이 형성되었을 거라고 한다. 이곳도 문화재로 관리한다. 길을 포장하여 다니기 좋게 해놓았다. 환도산성에서 내려와 이 고분군을 보았다. 책으로만 배운 고구려의 묘제 양식. 적석묘, 계단식 적석묘를 직접 본다. 이러한 묘제는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 양식이다.     

▲ 환도산성 아래에는 고구려 고분군이 있다. 산성하 고분군이라 한다. 1411호 고분에서 고구려 묘제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햇빛이 뜨거운 한낮. 돌무지 옆에서 고구려 역사를 배운다. 집안박물관의 자료를 보면 고구려 고분군이 집안에만 80곳이 있다고 한다. 묘지는 현재 8,000개 남아있다. 산성하 1411호 묘.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안내석에는 고구려 귀족묘라고 하였다. 첨방추형(尖方錐型) 봉토석실묘(封土石室墓). 5세기 무렵의 고분이라 한다. 둘레가 13.5미터에 달하고 높이가 4미터. 햇볕이 따갑건만 아무도 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숱한 무덤 가운데 이  고분군이 사람의 발길을 잡는 건 고구려의 역사를 말해주기 때문이리라. 우리에게는 돌 하나 무덤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더는 훼손되지 않고 고구려의 역사를 영원히 증거해주기 바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버스는 이제 국내성으로 간다. 환도산성에서 2.5킬로미터 남쪽에 있다. 국내성은 훼손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성벽만 남아 있다. 성터 안에는 주택,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예전에 집안시청이 있던 곳이 국내성터라 하여 시청을 옮기고 발굴 작업을 했으나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고구려공원을 조성했다. 

▲ 국내성 터에 세운 문물 보호 표석. 이 표석이 반가운 건 보호 대상이 고구려 유적 국내성이기 때문이다.

국내성 북문으로 동성로를 타고 들어가 왼쪽으로 단결대로를 가다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서문을 향해 갔다. 차창 밖으로 언뜻 보이는 성벽. 아, 국내성이구나! 서문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안내석이 크게 눈에 들어온다. “보호문물 전승문명(保護文物 傳承文明)” 문물을 보호하여 문명을 전승하자. 이 안내석이 반갑다. 국내성 옛 모습은 사라지고 성벽만이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흥망성쇠를 이 국내성도 결코 피해가지 못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1년 조를 보면 “교시(郊豕 : 교사(郊祀)에 쓸 돼지)가 풀려나 도망을 가자, 왕이 희생(犧牲)을 맡은 설지(薛支)를 시켜 뒤를 쫓아가게 하였다. 설지는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잡았다.” 하였다. 설지는 왕에게 국내가 넓어 도읍으로 삼을 만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기로 하였다. 국내(國內)라고 한 것은 아마 졸본 기내(畿內)의 땅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으로 본다.     

서기 3년 고구려가 이곳으로 천도하여 427년 장수왕 15년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국내성은 425년간 고구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니 집안 곳곳에는 고구려의 역사와 유물이 남아있다. 지나는 곳마다 벽화 속에 말 달리는 무사가 나올 것 같다.
 
도읍을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국내성은 별도(別都)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구려는 평양성, 국내성과 한성(漢城, 황해도 재령) 삼성을 운영했다.

국내성은 보장왕 대에 와서 운명이 엇갈린다. 당시 실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은 뒤 세 아들은 서로 싸웠다. 막리지가 된 큰아들 남생(男生)이 동생인 남건(男建)·남산(男産)과 대항하였으나 세가 밀리자, 남생이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나 자기 아들을 당나라로 들여보내 이세적의 향도(向導)가 되게 하였다. 그로 인해 국내성은 당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고구려를 배반하고 당에 붙은 연남생은 잘 되었을까. 혼자 호의호식하고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성(姓)도 지키지 못했다. 당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휘한다고 하여 천(泉)을 성을 바꾸었다. 1923년 가을 중국 하남 낙양(洛陽)의 북망(北邙)에 그의 묘지가 출토되었는데 천남생(泉男生)으로 기록되었다.

▲ 국내성 서문 성벽.

 조선시대 이 국내성으로 성을 옮기자는 주장을 한 사람이 있다. 의주 부윤 이명언이다. 이명언은 경종 1년(1721) 6월 성을 옮길 방략을 상소하였다.

"서변(西邊)의 보장(保障)의 중지(重地)로서 본부(本府)보다 나은 곳이 없으나, 한 조각 고성(孤城)이 다른 험애(險阨)한 곳이 없고 믿는 것은 오직 장강(長江) 하나 뿐인데, 근래에는 수세(水勢)가 크게 변하여 창일(漲溢)할 때가 아니면 걸어서 물을 건널 수가 있으니, 요충지로서의 험애함을 이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서쪽 국경을 경비하는 의주성이 외로이 하나만 있고 지세가 험하지 않아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강을 해자(垓字) 삼아 방비하였으나 이도 수량이 줄어들어 평상시에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의주성이 군사기지로 취약하게 되었다. 국경을 수비하는 부윤으로 이를 고심하니 국내성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서 30리쯤 되는 거리에 고성(古城)이 하나 있는데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으로 곧 고구려에서 5백 년간이나 도읍을 하였던 곳입니다. 형세의 편리함이 본주(本州)의 주성(州城)보다 백 배나 나을 뿐 아니라 바로 하나의 천혜의 금탕(金湯)입니다. 몇 겹으로 둘러쌓인 속에 저절로 일국(一局)을 이루고 있는데 옛 성터가 지금도 완연하고 밖은 험준하고 안은 평탄하여 토곽(土郭)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위는 3천 6백여 보(步)나 되는데 그 안에는 옛 우물이 더욱 많고 겹쳐서 간수(澗水)의 여러 줄기가 마름이 없이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의 동남쪽에는 따로 산기슭 하나가 있어 옆으로 뻗어서 빙 둘러막고 있으니 하나의 외곽(外郭)을 이루어 놓았으며, 또 10여 리를 지나서 압록강의 여러 줄기가 하나로 합수된 곳이 있는데, 바로 대총강(大摠江)입니다. 또 고진강(古津江)이 있는데 대총강의 하류와 해구(海口)에서 합쳐지니, 이곳이 바로 양하진(楊下津)입니다.


구성(舊城)에서 수구(水口)에 이를려면 양쪽 골짜기가 묶어놓은 듯한데 그 가운데로 한가닥 길이 통해져서 바로 10리 장곡(長谷)을 이루고 있으니, 설사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압록강을 건너가도 한 걸음에 곡구(谷口)에 도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성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 백마 산성으로 물러나 지키더라도 적들이 또한 우리의 퇴로를 차단하지는 못할 것이니, 그 주성(州城)에 비교하여 같이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만일 국내성(國內城)으로 고을을 옮기고 백마 산성과 서로 성원을 의뢰한다면 비단 험준함을 믿어 스스로 견고하게 수비할 뿐만 아니라, 황주(黃州)와 철산(鐵山)의 통로가 두 성 사이에 있게 되니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해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본부를 이설한 뒤에는 저쪽과 우리의 사신이 곧바로 저들의 마전참(馬轉站)에서 권두(權豆)의 북쪽을 경유하여 대총강을 건너서 국내성(國內城)에 이르게 될 것이니, 아홉 개 참에서 하나의 참(站)으로 비용이 줄어들고 세 강을 따로 건너는 폐단이 일거에 모두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 국내성에서 곧바로 용천(龍川)으로 가게 되니 소관참(所串站) 하나가 없어지게 될 것이니, 비용 절감도 적지는 않습니다. 주성(州城)은 새로이 첨사(僉使)를 두어 지키게 하고 본부(本府)에는 장교들도 또한 많이 있으니 서로 협력하여 엄중히 지키는 곳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경종실록’ 경종 1년 6월16일)

이명언은 진(鎭)과 군사 배치까지 다시 상세하게 아뢰어 국방을 튼튼히 하는 방책을 올렸다. 경종은 이를 논의하도록 하였으나 비변사에서는 변통하는 것은 폐단이 생기는 법이니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복주(覆秦)하여 시행하지 못했다.  문제가 있으면 개선해야 하는데 바꾸면 문제가 생긴다고 그대로 놔두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국경을 지키는 부윤이 이리 상세하게 득실을 논하고 대안을 제시하였거늘, 한양 대신들은 묵살하고 만다.     

▲ 국내성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울타리에 기대어 고구려 흥망성쇠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도 이를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경조실록’에 “의주(義州)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실로 위급한 사태가 있을 때 믿을 곳은 못된다. 국내성의 형편이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지마는 나라의 습성이 인순(因循)에 젖어 있어 비록 좋은 계책이 있더라도 시행되지 못하게 되니, 한스러울 뿐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명언의 주장을 조정이 받아들여 시행했더라면 역사의 물줄기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후세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역사를 알면 알수록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국내성 성벽을 돌아보고 10여미터 안쪽으로 옮겨 점심식사를 했다. 조선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인데 상호에 신라가 들어가 있다. 고구려 국내성터에 자리잡은 신라 식당. 기분이 묘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
 
 
 글/사진.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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