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8일 명동촌에서 나와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철혈광복단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최봉설, 김준, 박웅세 등이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기관지 발행과 무기구입 등을 목적으로 1920년 1월 4일 용정 동량어구에서 일본은행권 15만원을 탈취했다.
이 거사를 후세에 기억하고자 용정 동량어구에는 ‘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탈취십오만원사건유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비가 오락가락하여 가까이 가지 않고 다리 너머로 비석을 바라보며 임찬경 박사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15만원 탈취에 성공한 독립운동가들은 곧바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무기를 구입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포위되어 최봉설만 탈출하고 체포되었다. 변절자의 밀고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오후에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도문에 다녀올 예정이어서 용정 일정을 줄였다. 비암산 일송정도 멀리서 바라보았다. 박청산의 ‘내 고향 연변’(연변인민출판사, 2004, 50쪽)에는 비암산 일송정을 이렇게 소개한다.
▲ 용정 비암산 일송정은 일정상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비암산 북쪽 산정의 깎아지른 듯 한 바위틈에 뿌리박고 자라난 소나무가 흡사 돌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비슷하다 하여 일송정이라고 불리웠다. 비암산 일송정은 룡정의 교원과 학생들의 원족 장소로, 반일투사들의 비밀장소로 리용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초에 일제는 ‘룡정에 든 수재는 일송정 귀신 탓’이라고 트집 잡더니 밤중에 군경을 시켜 나무에 구멍을 뚫고 후추 가루를 가득 채워놓고 쇠못을 박아 죽어버리도록 하였다. 그 후 명물 일송정 푸른 솔은 시들기 시작하더니 1938년경에 영영 말라죽었다. 1991년 룡정사람들은 소나무 한그루를 옮겨다 심었으나 살려내지 못하였다. 이듬해 3월 18일에 재차 소나무를 옮겨다 심어 살리는 데 성공하였다.” 학생들의 소풍 장소, 반일투사들의 비밀 회합 장소. 용정시 정부는 1991년 3월 12일 한국의 각계 인사들의 후원으로 옛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심어 복원하고 정자를 신축하여 그해 9월에 준공하였다. 또 ‘일송정기념비’를 세웠다.
가곡 ‘선구자’가 입에서 곧 나오려고 하였지만, 훗날을 기약했다. 다시 와서 일송정에 올라 “일송정 푸른 솔은~” 선구자 노래를 힘차게 불러보리라.
발길을 재촉하여 용정시인민정부 청사로 간다. 용정에 들른다면 이 청사도 꼭 보아야 할 곳이다. 1909년 9월 중일간 ‘간도협약’에 의거 일본은 용정에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설치했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은 총영사, 부영사, 부관, 서기원, 통역, 경찰부 등 기구를 설치하였다. 총영사관은 설립된 그날부터 방대한 침략기구를 동원하여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반일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이 영사관이 들어서면서 간도에 뿌리를 내린 한인 동포들이 큰 고초를 겪게 되었다. 안수길의 장편소설 '북간도'에서 그런 내용이 생생하게 나온다. 그 영사관이 지금의 용정시 인민정부 청사다. 원래 청사는 1922년 11월27일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고 일제는 재건축하였다.
▲ 옛 간도일본총영사관 건물은 현재 용정시인민정부의 청사이다.
영사관 주위에 2미터 높이의 벽돌담장을 쌓았고 부지 안에는 사무원 주택과 감옥 등 20여 채 단층집을 지었다. 용정시인민정부는 영사관 건물을 시정부청사로 사용하며 건물의 역사를 벽에 기록해두어 누구나 볼 수 있게 하였다. ' 간도일본총령사관' 옛터 소개는 이러한 내용이다. "'간도일본총영사관 본관' 옛터는 1926년 5월에 준공되었고 부지면적이 1,034평방미터이고 건축면적이 2,503평방미터이다. 반지하 한층 지상세층의 돌, 벽돌, 세멘트의 혼합건축물로서 지붕은 파란색철판 기와이며 건물외벽에는미황색타일을 붙였다. 건물 정면 중앙에 현관이 있으며 세 개의 아치형 출입구가 있다. 건물의 동서에 옆 문이 나있고 지하실 입구는 건물의 북쪽에 있다."구 일본총영사관임을 알리는 안내판 앞에서 임찬경 박사가 자세하게 설명했다. 연변에서 7년 살며 역사 현장을 샅샅이 찾아 누빈 공력이 뒷받침된 해설이었다.
▲ 옛 간도일본총영사관 터임을 알리는 안내문 앞에서 일본영사관, 훈춘사건, 경신대토벌 등 일제의 만행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영사관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기구이기 때문에 경찰을 둘 수가 없지요. 당시 중국이 힘이 약해 일본은 영사관에 경찰을 두고 나중에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훈춘 사건을 조작하게 됩니다. ”
일본은 반일투쟁을 진압하고 만주를 삼킬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할 구실을 찾기 위해 마적단 두목 진동(鎭東) 등을 매수하여 훈춘(琿春)을 습격하게 했다. 1920년 9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마적단 진동과 만순(萬順)을 매수하고 그 무리에 일본 낭인을 집어넣어 참모직을 맡게 한 다음 훈춘현성을 습격하도록 했다.
마적단은 9월 12일 한 차례 현성을 포위하고 은행 등을 약탈하고 가옥 200여 채를 불태웠다. 마적단은 재차 10월 2일 훈춘현성을 공격하여 일본영사관 분관을 불 지르고 일본경찰과 일본인 11명, 한인 6명을 살해했다. 상점을 불사르고 200여명을 인질로 잡아갔다. 이것이 일제가 중국 마적단과 결탁하여 조작한 ‘훈춘사건’이다.
10월 하순 ‘훈춘사건’을 핑계로 일본군 2만 명이 연변으로 침입하여 항일독립군 토벌에 나서다. ‘경신년대토벌’이 그것이다. 이 대토벌에 맞서 일어난 무장독립 전쟁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이다.
이 ‘경신년대토벌’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일본군은 조선족 마을을 만나기만 하면 남녀노소를 죄다 집안에 밀어 넣고 불을 질러 태워죽이고 수백 명의 무고한 청년을 생매장하였다.” 1928년 발간된 중국 자료에는 이렇게 전한다.
비에 옷이 젖도록 일제와 일본영사관의 폭거를 듣는다. 영사관 지하에 있었다는 감옥으로 이동하였다. 사람을 가둔 감옥 창살을 그린 그림에 '간도일본영사관 죄증 전시'라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영사관이 한인에게 저지른 죄상을 보려니 했는데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다. 건물벽에 '간도일본총령사관 죄증' 전람을 붙여놓았다. 전람(展覽)이라는 글은 일본영사관의 역사를 정리해 적었다.
▲ 일본총영사관 감옥은 영사관의 죄증을 알리는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간도일본총령사관 죄증' 전람
19세기말 많은 조선난민들이 연변지역에 이주해와 도문강 연안에 정착하였다. 1905년 일로전쟁 후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었다. 1907년 8월 일본은 소위 '조선사람의 생명 안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용정촌에 기어들어 비법적으로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고 중조변계분쟁을 일으켰다. 1909년 9월4일 중조양국정부는 '도문강중한변무조례'를 체결하고 조례에 근거하여 같은해 11월1일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철수하고 11월2일 룡정에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설립 개관하였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산하 5개 영사분관과 방대한 경찰기구를 설립하고 '간도' 각지역의 중요한 전략요충지에 배치하였다. 하여 '간도'는 일본제국주의가 전반 동북을 침략하는 발판이 되었다. 전람은 진실한 물증과 력사자료를 리용하여 '간도일본총령사관'의 내막을 폭로하고 있다. "
▲ 옛 간도일본총영사관 감옥은 영사관의 죄증을 전시하는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벽에는 '간도일본총영사관 죄증 전람'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이 감옥에서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고초를 겪었을지!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더욱 마음이 울적하였다. 10여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아 다시 돌아나와 사무원 주택까지 한 바퀴 돌아보았다. 옛 영사관에서 나오는 동안 누구 한 사람 말이 없다.연변에서 유명하다는 냉면집 ‘순희 냉면’에 가서 재중동포가 만드는 냉면을 맛보았다. 냉면 집에서 나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 있는 재중동포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안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가 한국에 돈 벌러 갔다고 한다. 손녀는 자신에게 맡겨두고.
아이에게 “엄마 아빠, 보고 싶니?”하고 물으니 “보고 싶어요.” 대답하고 웃는다. 엄마 아빠 앞에서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 얼마나 부모가 보고 싶을까. 할머니는 또 아들 며느리가 눈에 선할 것이다. 긴 말은 하지 않아도 한국에 간 아들과 며느리가 건강하고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이 전해왔다.
글/사진.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