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공원에서 만난 대구의 역사

달성공원에서 만난 대구의 역사

단군문화기획 81편 대구의 유래와 달성공원

단군(檀君)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고조선, 개천절, 홍익인간 등이 있을 것이다. 기자는 뿌리(Root)가 떠오른다. 이 땅에 5천 년의 뿌리를 내린 한민족의 역사라서 그렇다. 최근 대구에 다녀오면서 2가지의 역사를 만났다. 뿌리를 지키려는 역사와 훼손하려는 역사가 그것이다. 올해 광복 70년이라고 하지만 역사는 회복되지 않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 대구가 그랬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구시민조차 그러한 역사가 있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구와 달구벌

▲ 하늘에서 내려다 본 대구 달성토성이다. 사적 제62호이다(사진=대구시)

대구(大邱)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원래는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었다. 이것을 신라의 왕이 당나라식 한자 이름으로 개정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미국식, 그러니까 영어로 이름을 붙이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입김이 클수록 주체적으로 이름을 가지기도 힘든 것 같다. 아무튼 옛 이름은 우리의 선도(仙道)문화와 관련이 깊다. 선도란 유교, 불교, 도교 등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를 말한다.

정호완 대구대 교수는 “달구(達句)의 달(達)은 ‘높다, 크다’를 뜻한다. 공간으로 볼 때 높고 큰 곳은 산악을 뜻하며 이는 산악숭배에서 비롯하였다. 기원적으로 산악숭배는 태양숭배이며 이는 솟대신앙으로 이어지는 문화적인 유연성에 근거를 둔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름은 동네 이름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 교수에 따르면 달(達)이란 음은 달성군, 달성동, 달동, 달천(達川)에서 찾아볼 수 있고 달의 뜻인 ‘높다 크다’를 잇는 이름으로 대(大)는 대명동, 대신동, 대일동, 대천동, 대현동, 대암동, 대평동, 대방동, 대천동, 대곡동, 대동, 대고봉동, 대포동, 대진지, 대덕산, 대천 등을 들 수 있다. 또 달의 훈을 월(月)이라고 했을 때 월배, 월천동, 월산동, 월암동, 반야월 ,반월당, 월성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달구벌 축제처럼 여전히 달구벌을 공공연하게 쓰는 일이 있음은 한번 쓰이던 지명이 얼마나 보수적인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라고 설명했다.

고조선과 달성토성

▲ 대구 달성군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석관묘 3호와 인골(사진=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특히 달성토성(達城土城)이라는 유적이 주목된다. 현재 대구 중구 달성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올해 4월 국내 최초로 개통한 도시철도형 모노레일 3호선을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답답한 지하가 아니라 대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상이라서 좋다. 3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데 시민들이 한가롭게 산책하고 동물을 구경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수천 년 동안 달구벌을 지켜온 천혜의 요새였다고 한다. 경주의 월성과 비슷하게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토성이었다. 성벽의 둘레는 1.3km이고 성곽의 높이는 5~15m이다. 성벽의 아래층에서 조개무지, 성책, 토기자락 등이 발견됐다. 청동기 시대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쌓은 성곽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성곽발달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된다.

여기서 잠깐, 대구의 청동기 유적을 살펴보자. 역사로 보면 고조선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총 64곳에 이른다. 진천동 입석유적은 1998년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11호)로 지정됐다. 동심원 암각화와 성혈이 동시에 발견됐다. 주변에 장방형석축과 석곽묘 5기가 함께 발굴돼 제단(祭壇)으로 보고 있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은 어떠한가? 1970년대까지 3천여기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흔적만 남은 상태. 첫 번째 이유는 일제가 대구를 근대적 시가로 재편하면서 고인돌을 헐려버렸다. 또 1980년대 대구 도심이 팽창하던 시기에 아파트 건설 붐이 불자 농지들이 택지로 바뀌는 과정에서 훼손됐다. 이를 취재한 한상갑 매일신문기자는 "대구의 고인돌 잔혹사"라고 표현하며 "3천기가 넘던 고인돌은 동네 어귀에서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거나 어느 권세가 정원석이나 초석으로 팔려나갔다. 그중 일부만 남아 그 흔적만 더듬을 뿐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라남도 화순 고인돌유적처럼 대구 또한 고인돌왕국을 보여줄 수 있는 역사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린 셈이다.

지난 2008년 5월, “청동기시대인으로 추정되는 인골(人骨)이 대구에서 발굴됐다”라는 언론보도가 잇따랐다.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대구 달성군에서 청동기시대 석관묘가 확인됐고 13곳에서 유골이 발견됐다. 이 석관묘 내의 유골은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정강이를 약간 굽힌, 부분 굴장 형태로 매장돼 있었으며 가슴 쪽에 마제석검, 허리춤 쪽에 마제석촉이 각각 부장돼 있었다. 당시 남자 평균키가 150cm 안팎으로 추정할 때 170cm 정도의 키는 당대에서는 보기 드문 큰 몸집이라는 점, 석검과 석촉 등 유물과 함께 발견된 것을 볼 때 지도층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3천 년 전에 이 지역에 살았던 지도자라고 한다면 고인돌과 함께 고조선과 어떠한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다시 달성토성으로 돌아온다면, 이후 고려시대에는 달성서씨 집성촌이었고 조선시대는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유서 깊은 역사의 뿌리는 일제의 침략과 함께 잘려나가기 시작한다. 이곳에 대구신사(大邱神社)를 조성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공원조차 일본의 공원을 본 따서 만들었다는 점이다.(계속)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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