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이다. 클라라 슈만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슈만의 아내이자 브람스가 사랑했던 여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클라라가 살던 시대로 돌아가면 남편인 슈만 보다 피아니스트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했다.
14세에 그녀가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Op.7은 멘델스존의 지휘로 초연될 정도였으니 클라라의 명성은 당시 그녀의 아버지한테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왔던 청년 슈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독일의 100마르크에 그려진 그녀의 초상화는 독일에서 그녀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오만원권에 그려져 있는 신사임당이 당대의 뛰어난 문인 이상이었음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슈만은 라이프치히 최고의 음악 교사, 클라라의 아버지 프레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위해 그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면서 클라라를 만난다. 누구를 만나서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열정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의 음악교육이 클라라의 이른 성공을 가져왔지만 슈만과의 인연이 시작되며 그녀의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슈만과의 결혼 후 바로 다음 해 부터 무대에 선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보여준다.
# 반면 14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일곱 명의 아이를 돌보고 슈만의 정신병을 지켜보며 연주와 작곡 활동을 했다는 건 신체적,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녀의 연주 활동은 유일한 일상의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일곱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슈만은 정신 병원으로 들어간다. 이 때 클라라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녀와 아이들을 곁에서 돌봐준 브람스가 없었다면 아무리 강한 클라라도 좌절하지 않았을까.
21살의 브람스가 슈만 부부를 방문해서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연주했을 때, 클라라는 그때를 “하느님께서 직접 배달해 주신 선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브람스의 음악성에 대한 찬사였지만 결국 브람스와의 관계를 예언한 말이 되었다. 슈만이 죽은 후 브람스와 클라라는 40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의지한다. 그들의 사랑은 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심리적,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클라라는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하고 출판하는 선배 음악가로서의 역할을 한다.
# 어릴 적부터 클라라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하고 꾸준한 연습과 사람들을 관리하는 아버지의 교육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은 슈만의 타계 후 연주자, 작곡가, 기획자, 출판 사업까지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클라라의 삶의 동력을 키운 아버지와의 관계를 슈만과 결혼하기 위해 철저히 등을 돌렸지만 그녀의 마음 한 켠에는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이 있었을 거다. 결혼생활이 현실적으로 힘들었음에도 클라라는 슈만에 대한 내조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커리어도 포기하지 않는 몰입된 삶을 보여준 것도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한 결혼을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몸부림이지 않았을까!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던 신동 피아니스트의 삶. 누구의 아내로 묻혀 살기에도, 남편의 정신병에 시달리는 불행한 결혼으로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아내로서 최선을 다한 삶을 보여준 클라라의 삶은 내가 만난 인연과 환경에 대해 재조명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클라라의 작품도 더 많은 연주홀에서 자주 울려 퍼지는 날을 기대해보며 세 남자 비크, 슈만, 브람스의 등불로 살았던 그녀를 다시 떠올려본다.
글. 이지영 leemusiclab@gmail.com | www.leemusiclab.com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University of Wisconsin 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지영은 피아니스트, 음악방송인, 공연기획자, 콘서트가이드, 음악큐레이터 등의 폭넓은 활동을 하면서 ‘삶 속의 음악, 음악 속의 삶’이라는 화두로 대중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다양한 경험과 만남을 통해 얻은 삶의 지혜를 2019년 한국뇌과학연구원 발행 <브레인>에 기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