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의과대학 교수의 엑스레이 기법을 활용한 작품 18점이 예술의 본고장인 파리에서 전시되고 있다. 취미로 시작한 활동이라는데 엑스레이 아트 선구자로 자리매김되었다. 이 뿐 아니라 고등학교 때부터 해온 화폐수집에다 현미경, 고지도, 엑스레이 튜브 수집 등 취미만 20여종에 이른다.
13년째 어린이 별보기 행사도 해오는 등 어릴 적 아버님께 물려받았다는 다빈치식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 연세대학 강남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정태섭 교수를 만났다.
의사로 바쁘실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하는지 놀랍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의 교육이 남달랐나요.
아버지께서 어릴 적부터 이른바 ‘다빈치식 교육’을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코메니우스, 에이치 지 웰스(H.G. Wells),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 사람을 꼭 기억하라고 늘 말씀하셨죠. 현대교육의 정립자로 널리 알려진 코메니우스는 인간의 전인성은 곧 인간의 내면세계에 내재하고 있는 지성과 덕성, 경건의 씨앗을 계발해야 한다는 전인교육을 강조한 인물입니다.
에이치 지 웰스는 《우주전쟁》을 쓴 영국의 소설가이며 처칠의 스승으로 지식의 연결고리를 강조한 사람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전인교육이 결국 창의성 개발의 기반이라고 얘기하셨죠. 하고 싶은 것은 마음껏 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셨고요.
엑스레이 아트의 선구자이신데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요.
시작은 작고 우연하게 다가왔습니다. 30년을 의사생활에 집중하다 보니 아이들은 늘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었나 봐요.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이 병원에 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 엑스레이로 가족해골(?)사진을 촬영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게 1995년도니까 벌써 17년이 지났는데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죠.
그런데 저는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 과학과 예술 쪽을 좋아했습니다. 뭐든 만들고 고치는 것을 무척 좋아했어요. 고교졸업 때 아버님께서 의과대학을 제안하셨는데 그것을 받아들인 후 의사의 길을 걷다보니 30년이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쉰 살이 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보니 어릴 적 꿈이 피어난 것 같아요. 사실 의사로 살면서도 발명특허도 내고 여러 취미활동도 하면서 남들하고 좀 다른 것들을 해온 것도 쌓여왔던 것 같습니다.
연구실에도 수집품이 쌓여 있는데 취미가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1989년부터 과학자가 도안된 화폐를 수집했습니다. 세상에 누가 과학자가 도안된 화폐만 수집하겠어요?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내가 좋아서 계속해온 것입니다.(정 교수는 2004년 ‘새 지폐에 우리 과학자 얼굴 모시기 운동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이공계와 과학계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2,257명의 서명을 받아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을 새 지폐의 도안으로 채택할 것을 제안하는 건의서를 한국은행에 제출하기도 했다.)
화폐 이외에도 고지도를 모으고 있는데 동해가 기재된 고지도도 갖고 있습니다. 또 엑스레이의 전신인 엑스레이 튜브와 현미경도 수집하는데, 취미가 한 스무 가지 되는 것 같아요.
교수님 얘기를 듣다 보니 시간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 어떤 습관을 갖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학생들에게도 하는 얘기인데 뭐든지 처음은 힘이 듭니다. 연을 날릴 때도 맞바람이 불 때가 힘이 드는데, 처음에 띄울 때 최대로 높이 띄워야 합니다.
연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높이 올라갔다고 생각해서 멈추거나 올리기가 힘들면 그만두는데, 그걸 넘어서면 어느 순간 바람이 잠잠해질 때가 있습니다. 조금 가다가 힘이 든다고, 숨이 차다고 멈출 게 아니라 한번 그 한계를 넘어서봐야 합니다.
수많은 지식들을 연결하는 남다른 장점이 있으신데, 어떤 계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지요.
중고교 시절에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을 읽었는데 군대 갈 시점에 동아대백과사전 30권짜리 한글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보름에 한 권 정도씩 해서 1년에 다 읽었으니 3년 동안 세 번을 읽은 셈이죠.
군대 3년 동안 30권짜리 대백과사전을 세 번 정독하니 주변에서 다 미친놈이라고 했죠. 하지만 그때 습득한 수많은 정보들이 쌓이면서 나중에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데 단단한 기초가 된 것 같습니다.
창의성 개발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는데, 다빈치식 교육의 실천가로서 해주실 얘기가 있으신지요.
우선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단기간의 것이 아닌 장기간의 것이어야 하죠. 나쁜 것이 아니라 인생을 건 끈질긴 욕망, 갈망하고 성취하려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쌓이고 쌓이는 것이라야 어느 순간 핵융합이 일어나듯 창의성이 폭발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레벨에 이르기까지의 지식은 사실 크게 쓸모가 없는데 그런 지식을 갖고 아이디어라고 하면 안 되죠. 창의성은 아이디어 차원이 아니라 끝장을 봐야 나옵니다. 그러려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해보지 못한 것, 남들이 가지 않을 길을 간다는 성취감과 즐거움, 그러한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은 모두들 얄팍한 경제논리에 당하고 있어요. ‘최소의 투자와 최대의 이익’이니 하는 것들로 별로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려고 듭니다. 무한대의 투자, 무한대의 노력이 필요한 것에 경제논리를 적용시키면 안 됩니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뭔가 남다른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습니다. 평소 다양한 정보를 깊이 파고든 덕에 기회가 왔을 때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래서 창의적인 사람들은 기회를 잘 포착하고 잘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남과 비교하지 않고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일례로 여기 이 스카프는 전 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겁니다. 판매하는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핸드메이드로 소장하고 있는 거죠.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면서 하나 하나씩 도전해가는 게 그들이 가진 남다른 점인 것 같아요.
처음 전시회를 열 때 열세 곳의 갤러리에서 거절을 당하면서도 계속 전시할 갤러리를 알아봤습니다. 또 예술 분야의 20~30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야 할 때는 의사, 교수라는 자리를 내려놓고 완전히 그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는다고 아예 버리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자신을 내려놓고 낯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창의성 개발을 위해 특히 날줄교육을 강조하시는데…….
요즘 교육의 대부분이 수직화된 씨줄교육입니다. 창의성은 수직화된 교육과 거리가 멀어요. 씨줄교육과 날줄교육이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날줄교육이 활성화될수록 지식과 지식이 연결되면서 창의적인 발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항상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것, 함께 하는 것에 익숙해요. 보통 누가 앞에 뛰고 있으면 안심하죠. 앞에 뛰는 사람이 없을 때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는 가이드라인이 있는 길을 안심하지만, 가이드라인 없이 미지의 세계에 혼자 도전하는 즐거움도 중요합니다.
남이 알아주고 아니고는 상관없습니다. 그냥 내가 즐거워서 하는 거죠.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이루지 못합니다. 지속성이 떨어지니까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은 느리지만 어느 순간 빛을 볼 때는 크게 드러납니다.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요.
요즘에는 문제를 잘 푸는 학생은 많은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학생은 드뭅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아온 거죠. 하지만 창의적인 인재들은 스스로 문제를 찾고, 문제를 풀려고 도전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성이 너무 메말랐어요. 제가 어린이들과 함께 별보기 운동을 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세상의 절반이 하늘인데 만날 땅만 보고 다녀요.
고개를 살짝만 들어도 푸른 하늘이 보이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볼 수 있는데 그걸 하지 못해요. 마음이 팍팍하고 감성이 메말랐으니 하늘을 볼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죠. 오늘 제가 한 얘기들이 시대에 맞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긍은 하시지 않겠나 싶습니다.
온갖 수집품으로 가득한 그의 연구실처럼 정태섭 교수와의 인터뷰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시간에 쫓기는 의사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엑스레이 아트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수십 가지의 취미활동을 하면서도 하늘을 보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워 시간을 쪼개 13년간 별보기 운동을 해오고 있는 그의 따스한 감성이야말로 창의성 발현의 원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글·장래혁 editor@brainmedia.co.kr | 사진·박여선 pys03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