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면 길이 보이더라

* 뇌야 놀자

브레인 22호
2010년 12월 07일 (화) 15:24
조회수25819
인쇄 링크복사 작게 크게
복사되었습니다.

 


걷기가 열풍이다. 제주 올레길, 강원도 바우길, 지리산 둘레길 등 걷기 좋은 길에 사람들이 몰린다. 문명의 발달로 거의 모든 것을 앉아서 해결할 수 있게 된 지금, 사람들은 시대가 허락한 편리에 의문을 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걷기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걷기가 뇌를 풀가동시킨다.

사람이 평생 살면서 걷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프랑스 생물학자 이브 파칼레는 인간이 여든 살까지 산다면 평균 지구를 11바퀴 도는 거리를 걷는다고 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다른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 가장 원초적인 이동 행위인 걷기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걷기는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인 운동이다. 미국의 운동생리학자 폴락 연구팀이 달리기, 자전거 타기, 걷기, 아무것도 하지 않기 등 네 가지를 비교 분석한 결과 걷기가 체지방을 감소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하루 1회 30분씩 주 3회, 20주간에 걸쳐 실험한 결과, 걷기를 통해 체지방률이 13.4% 감소한 데 비해 달리기는 6.0% 감소하는 데 그쳤다. 의외의 결과다.

걷기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최선의 운동으로 두뇌 발달과도 관계가 있다. 전문가들은 걷기 등의 간단한 운동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두뇌 기능을 향상시킨다고 말한다. 이만균 경희대 스포츠의학과 교수는 “아침에 일어나 걸으면 뇌로 가는 혈류량이 증가해 두뇌 기능이 활성화한다.

또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도 잘돼 주의력, 기억력, 집중력이 좋아진다”고 밝혔다. 영국 알츠하이머협회의 클라이브 밸러드 회장은 “두뇌 게임을 하는 것보다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 기억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걸음걸이가 운명을 바꾼다는 《장생보법》의 저자 이승헌 총장(글로벌사이버대학교)은 “걷다 보면 불필요한 생각은 저절로 떨어져나간다.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답을 알게 된다.

신선한 에너지가 몸 구석구석까지 막힘 없이 흐르기 시작하면 의식은 명료해지고 사고는 단순해진다. 순간적인 판단력과 직관력이 발달하고 행동도 진취적으로 바뀐다”며 일이 막힐 때는 무조건 걸으라고 권한다.


산책, 뇌에 길을 내다.

걷기의 매력은 단순히 신체적 건강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리를 움직여 직접 걸을 때 우리 뇌에서는 다양한 정신적 활동이 일어난다. 특히 걷기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방법으로 효과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걷는 동작이 뇌에 산소를 공급해 두뇌를 활동하기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들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 에세이스트 에밀 시오랑은 “일요일인 어제 리옹 숲 기슭을 20km도 넘게 걸었다. 오늘 내 안에는 철학에 대한 도취와 열광이 충만하다. 뇌는 근육을 움직일 때만 작동한다”고 했다.

걷기를 통해 문학적 영감을 받은 작가들의 증언은 부지기수다.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영국의 레이크 지역과 유럽 전역을 도보로 여행하며 시적 영감을 얻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도 유럽을 도보로 여행하며 《고독한 보행자의 상념》을 썼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중원 천지를 직접 걸으며 《열하일기》를 썼다. 과학자나 철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뉴튼은 산책을 하다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우쳤고, 철학자 칸트는 늘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산책한 것으로 유명하다. 헤겔, 니체 등도 산책 마니아들이었다.

《걷기의 역사》를 쓴 레베카 솔닛은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자신을 속박하던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서 걷기를 예찬했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의 걷기에 대한 통찰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육체와 정신의 일치를 중시했던 그는 “우리가 걸음을 내디딜 때 발에 있는 26개의 뼈와 1백 개가 넘는 인대, 근육 그리고 힘줄과 신경이 유기적으로 운동한다. 따라서 사유는 뒤얽힌 혈관, 섬유, 정맥 힘줄을 타고 의식까지 전진한다”고 했다.

그는 “앉아 있으면 사유는 잠들어버린다. 흔들어놓지 않으면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이나 직관은 몸속의 신경, 근육, 장기와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주장했다.

사유가 두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육체적인 컨디션에 따라 다듬어지고 정리되는 지적 결과물이라는 얘기인데, 걷기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는 실로 뜨끔한 지적이다.


몸이 걸으면 마음도 걷는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걷기의 가장 큰 효능은 명상이 아닐까. 장 자크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긴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페루의 잉카 트레일, 뉴질랜드의 밀포드, 히말라야 트레일 등 세계에는 이름 난 ‘걷는 길’이 많다.

이 길들 중에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이 유명해진 것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통해 이 길이 내면을 찾아 떠나는 명상의 길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베르 올리비에에게도 걷기는 도보 여행 이상의 의미였다. 그는 기자 생활을 은퇴한 예순두 살에 걷기를 시작했다. 콤포스텔라 2천3백km를 3개월 동안 걸은 다음 그는 내친김에 실크로드 도보 여행에 나섰다. 이스탄불과 중국의 시안을 잇는 1만2천km의 길을 오직 걸어서 완주하는 데 4년이 걸렸다.

그의 걷기가 얼마나 철저했느냐 하면 길을 걷다 날이 저물면 일단 자동차를 타고 숙소까지 갔다가 다음 날 다시 전날 걸었던 장소로 돌아와 걷기를 시작할 정도였다. 그는 걷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걷기를 통해 정신을 벼린 것이다. 

인류사의 중요한 순간들에도 사람들은 늘 걸었다. 프랑스 혁명 때 분노한 군중이 도심을 걸었던 것처럼 파업과 시위의 중요한 형식의 하나로 사람들은 걷는다. 걷기는 또 생활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한국의 스콧 니어링 같은 삶을 살았던 철학자 다석 유영모 선생은 강의가 있는 날에는 북한산 자락의 집에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까지 걸어 다니는 게 일과였다.영화 일을 하면서 세계 5대 사막 레이스를 완주한 김효정 씨는 자기 자신의 열정을 확인하기 위해 걸었다고 한다.

비영리 환경교육 기구 ‘플래닛워크’의 대표인 존 프란시스는 지구 환경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평생을 걸어 다녔다. 그는 우리나라 서해 기름 유출 사고보다 50배나 심했던 1971년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일어난 기름 유출 사고 현장을 보고 동력을 사용하는 자동차를 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후로 그는 22년간의 도보 여행, 17년간의 침묵 여행을 이어갔다.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에서 그는 “걷기와 침묵은 나를 구원해주었다. 속도를 늦추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해주었다.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걷기라는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영적이고 성스러운 감정이 싹튼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사람은 보통 걸음으로 걸으면 한 시간에 4km 정도를 걷는다. 시속 4km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그 속도로 꼬박 4백16일을 걸으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두 발로 걸을 때 우리의 정신도 함께 걷는다. 하여, 자기의 걸음을 걷는 것이야말로 온전히 자기 삶을 사는 것 아닐까. 당신은 지금, 어떤 방식의 걷기에 이끌리는가.

이왕 걷는 길, 창조적으로 걷자!

장수 국가인 일본에서는 1년 내내 걷기대회가 개최될 정도로 걷기에 관심이 뜨겁다. 영국인은 건강관리를 위해 걷기를 즐긴다. 성탄절 다음날인 복싱데이(Boxing Day)에는 성탄절 음주의 피로를 풀기 위해 걷기대회가 열리고, 유방암 예방 걷기대회도 매년 개최된다.

프랑스인 4명 중 1명은 오래 산책을 하듯 걷는 ‘랑도네(Randonnee)’를 즐긴다. 독일에서는 사회 저명인사들이 앞장서 걷기 운동에 동참하면서 걷기가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에서는 걷기가 비만과 질병은 물론 소외 등 사회적 병리 현상을 치료하는 특효약으로 대접받고 있다.

벨기에의 걷기 운동 프로그램은 비행 청소년을 교화하는 데 활용된다. 이제 걷기는 더 이상 건강해지기 위한 성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삶을 고행으로 여기는 오랜 순례자들의 통과 의례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발달과 최신 기술의 접목으로 걷기는 이제 젊은 세대의 또 다른 놀이 문화, 콘셉트 워킹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1. 드로잉 워킹.

최첨단 기술은 걷기를 오락으로 승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GPS 드로잉’은 GPS를 들고 걸으면서 자기가 이동한 경로를 이어서 그림을 그리는 신종 예술이다.

영국의 제레미 우드가 처음 시도했다. 그는 2000년경부터 영국 변두리를 걸으면서 그 동선으로 코끼리와 나비 등의 그림을 그려 홈페이지(
www.gpsdrawing.com)에 올렸다.

이 놀이는 지난해 8월, <뉴욕타임스>에 소개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지도 공유 사이트 에브리트레일닷컴(
www.everytrail.com)에는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며 그린 다양한 GPS 드로잉이 넘쳐난다.

GPS 드로잉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놀이다. 


2. 지하철 노선 정복 놀이


국내에서 걷기가 놀이와 접목된 예로는 디시인사이드에서 유행했던 ‘지하철 노선 정복 놀이’를 들 수 있겠다.

한 네티즌이 상일동에서 여의도까지 지하철 5호선을 따라 걸으며 지하철역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커뮤니티 이용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놀이다.

이 놀이는 평소에 잘 몰랐던 동네 구석구석을 도보로 여행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반나절 도보 여행으로도 발전했다.

글·전채연
ccyy74@brainmedia.co.kr

ⓒ 브레인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 뉴스

설명글
인기기사는 최근 7일간 조회수, 댓글수, 호응이 높은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