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둔재가 되지 못한 백치천재

[영화, 뇌로 다시 보기]

브레인 14호
2010년 12월 21일 (화)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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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데스노트>의
주인공 L.


천재적인 추리력을 지닌 생활 부적응자
영화 <데스노트>에는 괴상한 천재가 한 명 등장합니다. L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적어도 그 영화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탐정이죠. 그런데 이 남자의 행색이 매우 특이합니다. 외출도 안 하고 매일 컴퓨터만 쳐다보는지 피부는 창백하며 눈에는 다크 서클이 선명합니다.

말투는 컴퓨터에서 합성해낸 음성 같은데다 옷은 매일 똑같은 파자마이고, 의자에 어떻게 앉는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봐서는 천재가 아니라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이거나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바보처럼 보이죠.

하지만 그가 범죄 현장을 분석하고 범인에 대해서 추론할 때면 누구나 그의 놀라운 직관과 통찰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는 추리력에 있어서는 엄청난 천재지만 일상적인 생활 영역에서는 부적응자인 셈입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대비 효과를 통해 L이라는 인물의 개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겉과 속이 전혀 상반되는 인물로 설정했을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전반적으로 지적 장애인인데 특정한 영역에서만 천재인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이들을 학계에서는 백치천재(idiot savant)라고 부릅니다. 백치천재란 대부분의 영역에서는 백치지만 특정한 분야에서만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백치천재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1988년에 만든 영화 <레인맨>이었습니다. 당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레이먼드 배빗이 바로 전형적인 백치천재였거든요. 그래서 그 뒤로 백치천재를 레인맨 신드롬Rainman Syndrome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별 쓸모가 없는 천재성
심리학계에 보고된 가장 유명한 백치천재로 나디아Nadia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두 살 때 자폐아 진단을 받았는데 세 살 반이 되던 어느 날 연필을 집더니 엄청난 그림을 그려대기 시작했죠. 그녀는 자기가 본 것을 거의 사진기처럼 정확하게 도화지에 그려냈습니다. 그녀가 네 살 때 그린 달리는 말의 그림은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성인보다도 더 정확했습니다.

<레인맨>에 등장하는 레이먼드와 같은 사례도 있습니다. 조셉Joseph이라고 불리던 한 남자는 ‘1,234,567,890은 몇 곱하기 몇이냐’는 질문에 눈을 한 번 깜박 하고는 곧장 ‘9 곱하기 137,174,210’이라고 대답하는 식으로 엄청난 계산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어떤 백치천재는 인간 만세력이었습니다. ‘2024년 2월의 첫 번째 목요일이 며칠이냐’고 질문하면 역시 눈을 한 번 깜박 하고는 곧장 ‘1일’이라고 대답하는 식이었죠.

음악 분야에도 백치천재가 있는데 트레버Trevor라는 이름의 한 아이는 여섯 살 때 자기 형의 피아노 연주를 듣더니 곧장 피아노 의자 위로 기어 올라가서 형보다 더 정확하게 그 연주를 재현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들 백치천재들의 능력은 유감스럽게도 실제로 써먹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개성이나 창의성이 쏙 빠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백치천재의 뛰어난 능력은 동전의 양면
어떻게 이런 백치천재들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보통 사람들은 이들을 보며 놀랍고도 안타까운 심정이 들게 됩니다. 저렇게 멍청한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놀라고, 만약 다른 영역에서도 약간만 머리가 좋다면 정말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안타까운 거죠.

그러나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들의 뛰어난 능력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백치임에도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다른 부분들이 모두 백치 수준이기 때문에 그런 엄청난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라는 거죠.

호주 시드니 대학 뇌과학 연구실의 앨런 슈나이더A.Snyder 교수는 이런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대학생들의 머리에 강력한 전자석을 붙여서 그 부위의 뇌 기능을 일시적으로 저하시켜봤습니다. 그랬더니 이 대학생들이 갑자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더라는 거죠.

뇌의 어떤 부위에 전자석을 붙이느냐에 따라서 어떤 학생은 계산 능력이 엄청나게 높아지고, 어떤 학생은 사진을 한번만 보고도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기억할 수 있게 되고, 어떤 학생은 눈짐작으로 사물의 길이를 센티미터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자석을 떼어내면 이들은 다시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고요.

슈나이더 교수는 자신의 실험 결과를 통해 우리 뇌의 일부 스위치를 내리면 나머지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뇌 기능의 균형이 이룬 최고의 걸작품은 바로 당신!
뇌의 기능은 정말 신비하죠. 어떤 부분의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약화되는 것이 다른 부분의 기능을 비정상적으로 강화시킬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자폐아나 백치가 이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지극히 평범한 능력이야말로 뇌 기능의 균형이 이루어낸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거죠.

지금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당신의 뇌에서는 각각의 시냅스들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논리와 감정 사이의 균형이고, 사회적 지능과 수학적 지능 사이의 균형이며, 기억과 추억 사이의 균형이기도 합니다.

그 균형 덕분에 우리는 글을 단순히 정보의 덩어리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개성과 생각을 이해하는 창문으로 사용하며, 그 창문을 통해 이 세상을 보다 넓게 조망하고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 미소는 인생의 참 맛을 아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조금은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레이먼드와 같은 백치천재보다는 평범한 둔재가 되는 것이 훨씬 더 대단한 일이니까요.

글·장근영 jjanga@nypie.re.kr《팝콘심리학》 《너, 싸이코지?》 《영화 속 심리학》을 쓰고,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을 번역한 칼럼니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 현재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일하고 있으며  블로그 ‘싸이코짱가의 쪽방’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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