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 히스토리] 살면서 경험한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브레인 히스토리 ④

브레인 95호
2022년 10월 22일 (토)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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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과잉기억증후군 진단을 받은 미국의 질 프라이스Jill Price는 자신의 과거를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 어떤 특정 날짜를 말하면 그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날 있었던 사회적 사건·사고는 무엇인지, 심지어는 그날의 날씨와 저녁식사로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기억해낸다. 

스마트폰 사용으로 간단한 전화번호도 기억하기 어려워진 현대인들에게 질 프라이스의 기억력은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라이스는 자신의 저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에서 본인의 기억 능력에 대해 ‘축복이자 저주’라고 표현했다. 


과잉기억증후군을 세상에 처음 알리다

1965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질 프라이스Jill Price는 12살이 되던 해 자신의 기억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매우 세밀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특정한 상황은 물론 일상적인 장면까지 모두 기억할 수 있었던 질은 그 모든 기억이 무한 재생되는 스트레스를 점점 더 많이 겪어야 했다. 더구나 기억이 자신을 어떻게 괴롭히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부모님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질은 34살이던 2000년 6월 8일 자신의 기억력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나섰다. 구글 검색으로 오랜 시간 학습과 기억에 관해 연구해온 제임스 맥거프James McGaugh UC어바인대학 신경생물학과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맥거프 교수는 90분 만에 프라이스를 돕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처음 만난 날, 맥거프 교수는《20세기 매일의 사건사고》라는 백과사전을 가지고 왔다. 그는 질에게 1979년 11월 5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프라이스는 그날은 월요일이고 그날 일어난 일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하루 전인 11월 4일에는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난입한 사건이 있었다고 말했다. 맥거프 교수는 책을 보여주며 그 사건이 일어난 날은 11월 5일로 프라이스가 틀렸다고 했으나, 질 프라이스는 강경하게 11월 4일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자료들을 확인해본 결과, 해당 사건은 11월 4일에 일어난 게 맞았다.
 

▲ 제임스 맥거프 교수 (사진. 페이스북)

질은 맥거프 교수가 제시하는 날짜를 말할 때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답변했다. 반대로 특정 사건을 제시하고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의 질문에도 완벽하게 대답했다. 평생 인간의 기억에 대해 연구해온 맥거프 교수도 질과 같은 사례는 처음이었고, 이후 질과 함께 다양한 연구과제를 진행했다. 그리고 2006년 2월 뇌과학 분야의 학술지 《뉴로케이스》에 ‘비상한 자서전적 기억의 사례’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계 최초로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tic Syndrome)’을 세상에 알렸다. 


자서전적 기억 외에 암기력과 인지기능은 평범해

기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간의 기억을 단기기억, 장기기억, 의미기억, 일화기억, 작업기억 등으로 분류한다. 각각의 기억은 특징적인 기능이 있으며, 그 기억들이 개별적으로 어떻게 생성되고 저장되는지, 일상생활에서 다른 기억들과 어떻게 조합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질 프라이스의 기억력은 개인의 삶에서 일어난 특정 사건에 대한 장기기억이 조합된 자서전적 기억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결혼한 날이나 자녀가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한 날의 기억은 자서전적 기억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자서전적 기억은 매우 선택적이다. 결혼식 날이나 끔찍한 자동차 사고처럼 매우 중요하거나 정서적으로 강렬했던 사건 위주로 기억한다. 

명절에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거나,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의 기억이 너무 달라 놀랄 때가 있다. 이처럼 인간의 자서전적 기억은 우리 뇌의 한 곳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기억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정교화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약 10초 정도가 소요되며 실수가 자주 발생한다. 때로는 서로 맞지 않는 기억 조각들을 끌어모아서 취합한 다음 회상하기도 해 기억은 종종 잘못된 정보를 만든다. 그래서 같은 상황을 경험하고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다.

맥거프 박사 연구팀은 각종 검사를 통해 질 프라이스의 기억능력은 자서전적 기억에 치중돼 있다고 밝혔다. 학습 영역으로 볼 수 있는 암기력에는 취약했으며, 기타 인지능력은 평범했다. 연구팀은 프라이스의 뇌가 일화기억의 인출을 담당하는 좌우 대뇌피질의 특정 영역이 일반인과 다른 것 같다고 추측했다. 

이후 후속 연구에서 질의 뇌 영상을 촬영한 결과, 대뇌구조의 24개 영역이 일반인에 비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인은 오래된 과거의 기억을 주로 뇌의 우전두엽에만 저장하지만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우전두엽과 좌전두엽에 모두 저장한다. 물론 이것이 과잉기억증후군의 모든 이유로 볼 수는 없다. 밝혀지지 않은 의문들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맥거프 교수팀의 연구 발표 후, 질의 사례는 학계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질 프라이스와 비슷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과잉기억증후군을 진단받은 사람은 60여 명에 이른다.
 

▲ 질 프라이스 (사진. ABC 방송 화면 캡처)


과거의 기억과 함께 떠오른 감정을 다시 경험해야 하는 고통

질의 기억력은 세 단계를 거치며 발달했다. 첫 번째 단계는 출생 후 7살 때까지로, 생애 초기 기억도 빠른 편이다. 생후 18개월 무렵 요람에 누워 있는데 강아지가 요람을 흔들어 울음을 터트린 순간이 최초의 기억이다. 2단계는 8살에서 13살까지로, 대부분의 날짜를 기억하지만 매일을 완벽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마지막 3단계인 14살 이후로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한다.

그의 기억력의 특징은 기억이 제어할 수 없이 자동으로 떠올라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마치 머릿속 스크린 위에 내 인생 전체를 줄줄이 엮은 영화가 끊임없이 상영되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시간 순서로 진행되지 않고, 이날에서 다른 날로, 좋은 시절에서 우울한 시절로, 부끄러운 순간에서 즐거운 순간으로, 혹은 정말 끔찍한 장면으로 툭툭 건너뛴다. 이런 상황을 통제할 수 없어서 나를 미치게 만든다.”

특정한 노래나 장소를 들었을 때 그와 관련된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를 ‘불수의적 기억'이라고 부른다. 이는 정보가 장기기억에 저장될 때, 그와 관련된 단어나 소리, 냄새까지 함께 축적되고, 기억을 회상할 때 ‘인출단서’라고 부르는 요인에 의해 촉발되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에 3~5번 정도 불수의적 기억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은 빠르게 뇌리에서 사라진다.

질 프라이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인출단서가 더 자주, 더 많이 나타나 머릿속이 항상 불수의적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하루에 3~5번이 아니라 수십, 수백 번씩 이런 일이 벌어져 머릿속은 기억으로 가득 차버린다. 게다가 보통 사람의 경우 불수의적 기억은 대체로 긍정적인 경험이 떠오르는 반면, 질은 좋았던 순간부터 끔찍한 순간까지 폭넓게 일어났다. 

성장하면서 점점 더 많은 기억이 쌓이고, 기억 때문에 얻는 고통도 커졌다. 현재 상황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과거에 느낀 감정들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가혹한 투쟁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기억과 함께 그 순간의 감정이 떠올라 조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묘사할 때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그 순간으로 빨려 들어가 그 삶을 다시 사는 것 같다. 어릴 때 느꼈던 공포심, 두려움 등이 두서없이 마구 떠오른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들, 남편의 죽음,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한 기억 역시 생생하게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끝없이 번복되는 과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뇌과학자를 찾다 

우리의 뇌가 장기기억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지만 보통 3세에서 7세 사이로 알려져 있다. 10대 청소년기에는 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정체성을 형성한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부정적 경험을 긍정적인 교훈으로 해석해 처리하는 ‘선택적 망각’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회상할 때 부정적인 기억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자기 비하, 피해의식,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안타깝게도 질은 후자에 속했다. 

7살 무렵부터 질의 부모님은 그의 체중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먹는 것에 대한 어머니의 끊임없는 지적과 전학 이후 학교생활 부적응 등 청소년기에 질은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13살 때부터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고, 잘못된 선택, 말실수, 잃어버린 기회 등 실패했던 기억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늘 불안했다.

질은 30대가 되어서야 끝없이 반복되는 과거에서 자유로워지겠다고 다짐하며 맥거프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연구 분야에서는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AJ’로 불린 질은 2008년에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The women who can't forget)》라는 책을 출간하며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는 책에서 기억의 본질과 자신의 기억력이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확인해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질은 자신의 책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어려움을 공유하고, 그들 역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질 프라이스는 자신의 사례를 통해 기억손상에 대한 치료나 예방 분야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라며, 여전히 기억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글. 전은애 기자 hspmaker@gmail.com

참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질 프라이스 , 바트 데이비스, 북하우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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