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거짓말을 해 봐

경찰청, 뇌지문 탐지기 도입

뇌2003년5월호
2010년 12월 22일 (수)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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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터지면 일단 동네 양아치들을 족치는 것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용의자들의 눈을 보면 ‘삘’이 온다는 자칭 ‘무당눈깔’. “한국은 땅이 좁아 두 발로 뛰면 범인은 다 잡혀”라고 큰소리치는 시골 형사 박두만에게서 우리는 그간 한국사회에서 관례화된 자백의존 수사관행의 단면을 본다. 이러한 현상은 20여 년이 넘도록 미궁에 빠져있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경찰청, 뇌지문 탐지기 도입

지난 해 검찰은 살인사건에 연루돼 조사받던 피의자가 숨진 후 다른 피의자 3명조차도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살인 사건 당시 피의자 3명의 행적에 대한 간접 정황 증거를 상당부분 확보해 놓은 상태였으나 강압 수사에 의한 진술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심증은 가되 물증이 없어 미궁으로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증거없이 먼저 사람을 불러 놓고 범죄를 캐묻는 수사 관행이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때맞춰 올해 경찰청에서는 ‘첨단 과학수사장비 확보 5개년 계획’에 따라 각종 신기술 범죄수사장비 총 10종 1천90여 점을 점진적으로 확보해 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최신 수사장비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뇌지문탐지기’. 한 대당 가격이 5억 원을 호가한다는 이 장비는 관련 범죄 장면 사진이나 단어 등을 용의자에게 보여주고 뇌파 반응의 변화를 분석, 거짓 여부를 판단하는 최첨단 수사장비다. 현재 한국 법정에서 거짓말탐지기가 참고할만한 증거 이상의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반면 뇌지문탐지기는 이미 미국 법원에서 그 결과에 대한 증거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추세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져요?

최근까지 용의자 진술의 거짓 여부를 알아내는 데 참고했던 것은 거짓말탐지기로 불리는 폴리그래프(polygraphy)였다. 폴리그래프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처럼 사람 역시 거짓말을 할 때 감정적인 반응을 한다는 전제 아래 개발됐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되면 정서 불안으로 맥박, 혈압, 땀, 호흡 따위의 생리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이러한 변화를 근거로 거짓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폴리그래프의 작동 원리다.

폴리그래프 조사는 1920년부터 거의 유일무이한 거짓말탐지 기술로 활용되어 왔지만 그 신뢰성에 대해서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거짓말탐지기가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심정적 동요이지 거짓말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도로 훈련된 냉정한 테러범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감정적인 동요를 전혀 일으키지 않을 것이고, 섬세하고 감성적인 일반인은 죄를 짓지 않고도 거짓말탐지기 앞에서 혈압이 오르고 맥막이 뛸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산하 국립조사위원회(NRC)가 실시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스파이 색출에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진짜 스파이들은 탐지기를 빠져나가는 훈련을 받기 때문에 거짓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서 반응 대신 뇌파를 측정한다

뇌지문탐지기는 이러한 거짓말탐지기의 정서 반응 대신에 인지 과정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미국 아이오와주 뇌지문연구소(Iowa-Brain Fingerprinting Laboratories)의 로렌스 파웰 박사팀이 개발한 ‘뇌지문감식’은 피검사자의 머리 위에 10여 개의 미세 전극이 내장된 장치를 씌우고 범죄 장면을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뇌파 반응의 변화를 측정한다. 범죄자가 뇌에 기억되어 있는 범죄 장면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특정 뇌파(P300)가 발생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 연구는 이미 1991년에 학술지에 발표되었으나,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2001년이 되어서야 국제적인 관심사로 부각됐다.

‘뇌지문탐지기’는 지난 2001년 미국 언론에서 선정한 5대 발명품의 하나에 들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피검사자가 범죄를 부인하려 들고 심지어 범죄 장면을 기억하기조차 싫어할지라도 범인의 뇌파가 범행을 자백할 것이라 기대한다. 뇌파 반응 이외에도 기계를 이용해 마음의 진실 여부를 검증하겠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버드대 심리학자 스티븐 코슬린은 거짓말을 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영역에 따라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뇌영상기술을 연구하고 있고, 미국 트래비스 세이머 교수는 범죄자가 수사 질문에 반응하는 시간을 측정하여 죄의 유무를 판독하는 검증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바야흐로 거짓말도 ‘보이는’ 시대가 곧 도래하리라 예측되는데, 현재 가장 활용가치가 높은 것이 ‘뇌지문탐지기’인 셈이다.

경찰청은 빠르면 내년부터 ‘뇌지문탐지기’를 국내 수사기관 가운데 처음으로 도입, 본청 과학수사과에 설치하여 시범적으로 운영할 방침이라고 한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미래사회에는 예지자를 이용한 ‘범죄예측시스템’이 등장해 살인자가 될 소지가 있는 사람조차도 미리 예견해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범죄자의 의지로 조절하기 힘든 뇌파를 측정해 범죄의 사실 여부를 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여겨진다.

뇌지문탐지기가 강압수사와 거짓 진술로 인한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고, 과학수사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거짓말탐지 기술이 아무리 고도화 해도 그 때문에 범죄가 줄어들거나 거짓말쟁이가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글│전채연 missingmuse@powerbr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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