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음식' 그 여유로운 반란

뇌와 음식

뇌2003년10월호
2010년 12월 23일 (목)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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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곧 돈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요즘, 1분 안에 식사를 내놓지 않으면 음료를 무료로 주겠다는 슬로건을 내건 패스트푸드점은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런 빠른 음식과 조급한 일상에 반기를 들고 느릿한 음식, 느긋한 삶을 주창하는 슬로푸드Slow food운동이 새로운 물결을 일으켜 주목받고 있다.

여성과 남성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위안을 느끼는 소위 ‘위로음식(Comfort Food)’이 서로 다르다고 한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성은 초콜릿 등 가공식품류를 위로음식으로 꼽았고, 이에 비해 남성의 경우에는 집에서 어머니가 해 준 밥 같은 음식이 위로 효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가공식품류를 선호하는 것은 집에서 차린 밥상이란 곧 자신의 가사 노동을 의미하고, 이는 또 다른 스트레스 상황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성에게도 음식을 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아마도 흔쾌히 집에서 차린 맛난 밥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않을까.








슬로푸드 vs 패스트푸드

집에서 차린 음식에는 무엇보다 인공 조미료가 덜 들었고, 인스턴트 음식이나 패스트푸드에 비해 시간과 정성이 더 들어있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이라는 영화에는 요리사의 마음이 그대로 음식에 담겨져 음식을 먹는 이가 그 심리상태에 동요하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음식을 먹으면 그 마음이 생생히 느껴지고, 연인을 잃어 슬픈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면 그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모두 엉엉 울어버린다. 고대의 선사들은 음식 맛만 보고도 음식을 만든 이의 심리상태를 알아차렸다는데,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나오는 가공식품에는 과연 어떤 ‘마음’이 들어있을지...

슬로푸드란 규격화되고 대량생산된 음식이 초래하는 전지구적인 입맛의 획일화를 지양하고, 각 나라의 전통 식생활 문화를 계승하자는 식생활 운동이다. 슬로푸드 운동는 1986년 미국의 세계적인 햄버거 체인인 맥도널드의 패스트푸드가 이탈리아 로마에 진출하자, 이에 반대하여 미각의 즐거움과 전통음식 보존을 위해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1989년에는 ‘슬로푸드 선언’이 파리에서 채택되었고 이로써 슬로푸드 운동은 공식화되었다. 현재 세계 45개국에서 7만여 명의 유료 회원이 참가하고 있으며, 그 상징은 느림을 표상하는 달팽이다.

경고문: 이 햄버거는 각종 성인병을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 바람!

패스트푸드는 21세기 전염병이라는 비만증의 주범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에선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어 비만으로 성인병에 걸린 사람들이 관련 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내는 경우가 흔하다. 패스트푸드가 각종 질병을 유발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이를 경고하지 않았기에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담배갑에 쓰인 경고문처럼 햄버거 포장지에 ‘각종 성인병을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 바람’이란 경고문이 찍힐 지도 모르겠다.

얼마전에는 지방과 칼로리가 다량 함유된 패스트푸드에 중독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미 워싱턴 의대 마이클 슈왈츠 박사에 의하면 “패스트푸드에 중독되는 이유는 체중이 늘면서 식욕을 조절하는 호르몬인 렙틴과 식욕을 유발하는 겔라닌의 정상적인 활동이 방해받기 때문”이라는 것. 뇌가 호르몬의 신호에 반응할 능력을 상실해 중독 증상이 나타나 비만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장이 단 집에 복이 든다

그렇다면 맘놓고 먹어도 좋을 슬로푸드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실 우리 민족은 슬로푸드의 고수다. 된장과 고추장 같은 장류와 김치, 젓갈류가 대표적인 슬로푸드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장은 10월에 햇콩으로 쑨 메주로 정월에 담았는데 6개월이 지나야 숙성되어 먹을 수 있는 된장이 된다. 된장은 과학적으로도 그 탁월한 효능이 입증되었고, 민간요법에서는 화상이나 뱀독 등의 해독에도 쓰인다. 소화흡수율이 된장보다 좋은 청국장은 삶은 콩과 볏짚에 붙어 있는 바실루스 서브틸리스 균의 조화로 그 독특한 맛이 나타난다. 이 균은 항암 효과가 있고, 각종 성인병에도 유효하다고 한다. 살아있는 유산균이 듬뿍 담긴 김치와 젓갈류도 우리 조상의 지혜가 돋보이는 음식이다. 얼마전 김치는 전염성 급성 호흡기 질환(SARS)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세계인의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서양의 대표적인 슬로푸드는 치즈와 맥주, 와인 등이 있다. 독일 맥주의 경우, 각 양조장마다 저마다 독특한 맛의 맥주를 생산하기 때문에 5천여 종이 넘는 맛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버드와이저나 밀러 등 대기업들이 시장을 점령하여 입맛이 획일화되었다. 이제는 독일조차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작은 양조장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어, 슬로푸드 운동가들이 우려하고 있다.

음식, 그 이상의 슬로푸드

슬로푸드 운동은 단순히 패스트푸드를 반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궁극의 목표는 슬로라이프, 즉 ‘여유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국내 슬로푸드 운동의 선봉격인 〈슬로푸드 슬로라이프〉의 저자 김종덕 교수는 걸어서 출퇴근하고, 집 근처 공터에 아이들과 함께 작은 텃밭을 일구며, 제철 음식을 먹기 위해 애쓴다. 바쁜 삶과 식습관 속에 우리가 잃는 것은 다만 건강과 미각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넉넉한 가슴이며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다.

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는 시간을 뺏는 시간도둑 얘기가 나오는데 주인공 모모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을 아끼는 사이,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속에 깃들여 있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글│정호진 hojin@powerbrain.co.kr
도움받은 책 〈슬로푸드 슬로라이프〉 김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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