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의 원천은 자기 걸음을 걷는 것

국제아동도서전 라가치 상 받은 작가 김희경

브레인 27호
2013년 01월 15일 (화)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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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초 한국 출판계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림책 《마음의 집》이 ‘아동출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가치 상 논픽션 부문 대상을 받은 것이다. 한국의 그림책이 세계의 작품들과 겨뤄 대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수상자는 이제 막 어린이책의 매력에 빠진 작가 김희경 씨. 그림책에 녹아 있는 마음에 대한 사유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마음의 집》은 작가 김희경이 글을 쓰고 폴란드 그림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가 그림을 그린 그림책이다. ‘누구에게나 마음이 있어. 우리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로 시작하는 글에는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고 하기에는 녹록치 않은 깊이가 있다.

파스텔 톤의 그림은 은근하고 따뜻하다. 한 장 한 장 오래 머물러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아동도서전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의 라가치 상 심사위원단은 “오래 생각하며 몰입하게 하는 한 편의 우아한 시”와 같다면서 “이런 책이야말로 어린이 문학의 자랑이자 명예”라고 극찬했다.


작가 김희경 씨는 이제 막 그림책 두 권을 낸 신인작가다. 그런 그가 세계적인 상을 받았으니 스스로 놀라거나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그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연일 이어지는 인터뷰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면서도 또박또박 들려주는 이야기에 꾸밈이 없고, 무엇보다 진지하고 깊은 눈매가 책과 닮았다.  


시 같은 그림책을 내다

《마음의 집》은 한번 보고 덮을 수 있는 그림책이 아니었다. ‘마음’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맞아요. 이 책은 기분 좋을 때보다는 우울할 때나 힘들 때 보는 게 좋아요. 제가 썼지만 저도 마음이 붕 떠 있을 땐 책이 눈에 잘 안 들어오더라고요.

요즘은 어린이책도 자극적이어야 잘 팔리는데, 이 책은 애초에 콘셉트를 담백한 쪽으로 잡았어요. 하지만 이런 글과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월간 <미술세계>에서 잠시 기자로 활동한 그는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현재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프리랜서 미술관 교육프로그램 기획자로 일하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술관 투어 프로젝트인 ‘모모뮤지엄’(
www.momomuseum.org)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책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기자로 일할 때 시각장애 어린이들의 전시회를 취재한 적이 있어요. 그전까지는 시각장애 어린이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우리들의 눈’이라는 단체가 무척 흥미롭더라고요.

거기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합류하게 됐어요. 거기서 시각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점자 촉각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멘토이자 친구인 어린이책 기획자 이지원 씨를 만났어요.

점자 책 《지도는 언제나 말을 해》를 쓰고 나서 이지원 씨가 어린이책을 계속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지요.” 

모르니까 쓴다
철학을 전공해서일까. 《마음의 집》은 아이들 대상의 그림책인데도 철학적인 사유가 돋보인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집이라는 공간으로 형상화한 것이 인상적이다.  

“보도자료가 그렇게 나가서 그렇지, 사실 철학적인 책을 쓰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저는 제가 궁금한 것에 대해 쓸 뿐이에요. 어른인 내가 모르는 것은 아이들도 당연히 모를 테니까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도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일단 ‘모른다’는 데서부터 출발해요.”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한 채로, 모르니까 잘 알기 위해서 더 열심히 자료를 모으면서 사유한다고 한다. ‘모름’이 ‘앎’으로 이어지는 접근법이랄까.  

“글을 써보니까, 모르면 한 문장도 쓸 수가 없더라고요. ‘나는 걸어간다’라는 단순한 문장을 쓰려고 해도, 내가 왜 걸어가는지 모르면 글이 써지지 않아요. 하다못해 일기를 쓸 때도 잘 모르는 내용이나 정확하지 않은 내용, 틀린 내용을 가지고 글을 쓰면 어김없이 글이 앞으로 나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는 것, 내가 깨달은 것만을 가지고 글을 써야겠다, 그도 아니면 철저하게 공부를 해서 내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솔직하다. ‘안다’가 아니라 ‘모른다’에서 시작할 수 있는 용기, 모른다는 것을 허심탄회하게 인정한 상태에서 겉멋에 빠지지 않고 자기를 속이지도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제 걸음을 걸을 수 있는 힘. 그게 그가 가진 창작자로서의 미덕인 듯했다.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솔직한 건지 아닌지 모르는 단계가 분명히 있거든요. 사실 아는 것만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렇다면 모르는 데서 시작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창조의 과정은 어떨까.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만 있어요. 그래서 책을 쓰기 전에 공부를 진짜 많이 해요. 지도 책을 쓸 때는 공교롭게도 석사논문 쓰는 시기와 겹쳤는데, 논문 자료보다 지도 자료를 더 많이 찾았어요. 쓰다 보니까 지도에 대해 내 언어로 알게 되는 기쁨이 있었고, 그런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쓸 수 있었어요.”


마음에 대한 자료를 찾기는 더 어려웠을 것 같다.  


“맞아요. 사실은 자료를 찾다가 포기했어요. 마음이라는 게, 자료를 찾는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방향을 바꿨죠. 사람들이 마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하나, 마음에 대한 구절 앞뒤에는 어떤 단어들이 연결되나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문득 마음이 공간을 닮았다는 걸 알았어요.”

마음이 모이면 창조가 일어나
올해 라가치 상은 45개국의 2백여 개 출판사에서 1천여 종이 경쟁했다. 이 상은 2년 이내에 출간된 전 세계 어린이책들 중에서 창작성, 교육적 가치, 디자인이 뛰어난 책에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으로 책의 내용뿐 아니라 장정의 수준, 디자인, 편집까지 심사의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작가와 출판사 모두에게 주는 상이다.    

“책이라는 게 참 독특한 매체여서, 글 쓰는 사람뿐 아니라 그림 그리는 사람, 인쇄하고 제본하는 사람까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기획자나 편집자, 그리고 그림작가 모두의 마음이 제때 잘 모여서 만들어진 책이에요.”

실제로 책을 만든 기획자와 작가, 편집자가 모두 점자 촉각 책 프로젝트 때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었고, 그림작가 역시 기획자의 친구라고 한다. 그림작가와 작업을 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20여 권이 넘는 그림책을 출간한 폴란드 작가로, 한국에서도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다. 다양한 질감의 종이와 천을 이용해 콜라주로 완성시킨 그림은 《마음의 집》의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글과 놀랍도록 잘 어우러진다. 


“이지원 씨가 폴란드에서 미술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폴란드 작가들을 많이 알고 있어요. 매년 3월 말에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 함께 가곤 하는데, 2008년에 도서전에서 이보나 씨를 만나 파도바에 함께 놀러간 적이 있어요.

기차를 타고 가면서 이지원 씨가 제 원고를 폴란드어로 번역해서 읽어주었고, 이보나 씨가 그 자리에서 자기가 그림을 그리면 안 되겠느냐고 먼저 제안을 했어요. ‘마음’이라는 한국어가 ‘마인드mind’라는 영어보다 훨씬 마음을 잘 표현한 것 같다면서요.

원체 남에게 그림을 그려주지 않기로 유명한 분인데, 먼저 제안을 해왔으니 우리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흔쾌히 승낙한 다음 2009년에 다시 볼로냐에 갔을 때, 스케치 상태의 초안을 볼 수 있었어요. 그 뒤부터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사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마음의 집》의 출간을 거절한 출판사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을 만들면서 세상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여러 사람이 같이 마음을 쏟아야 비로소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책에도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상을 받았다는 부담감이 별로 없어요. 이제 병아리 작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 편하게 받아들여요. 다만 상을 받아서 기쁜 건 내가 죽더라도 이 책은 남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최고의 창조는 아이, 최고의 예술품은 인생
그는 아직 실력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매일 일기를 쓴다고 한다.

“소설가 김연수 씨가 글이라는 것은 내 생각이 글자로 표현돼서 눈에 보이는 상태가 되는 거래요. 사람들은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뇌의 어딘가에 저장돼 있을 거라고 믿지만, 쓰지 않으면 다 휘발되어버린다는 거죠.

그래서 생각을 잡아두기 위해서 매일 A4 3장씩 글을 쓴대요. 그 말을 듣고 내가 너무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 쓰기를 실천하고 있어요.”


다음에 쓰고 싶은 소재는 ‘온도’라고 한다. 온도계가 없었던 시절, 눈에 보이지 않는 온도를 잡으려고 애를 썼던 과학자들의 고군분투가 너무 재미있다고. 그러고 보니 시각장애인을 위한 프로젝트부터 지도, 마음, 온도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유난히 천착하는 듯하다.   


“사실 너무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세상이니까, 나라도 그런 것은 쓰지 않겠다고 하는 소심한 반항 같은 게 있어요. 외모와 스펙이 다가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기준이 거의 절대적이잖아요.

사람들이 저를 볼 때 외모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고, 저 또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이면을 보려는 노력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창조물 중에 최고는 예술품이라고 믿었다는 그는 시각장애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아이들과 소통하면서 책을 만드는 것보다 더 놀라운 창조는 바로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창조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그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인 결혼을 할 것이고, 아이도 기르면서 삶이 창조가 되는 과정을 내내 지켜볼 거란다. 글 기계처럼 빨리 쓰지는 못하겠지만, 그때그때 쓰고 싶은 것에 매달려 한 발 한 발 자기 걸음을 걷겠다는 작가의 다음 책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글·전채연 ccyy74@naver.com
사진·박여선 pys0310@hanmail.net | 그림 제공·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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