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교수님이 두 분 계시다.
한 분은 언어학 교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민속학 교수님이시다.
대학 시절, 두 분에게서 특별한 아우라를 느낀 적이 있는데, 오랫동안 나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몇 장면이 있다. 봄날의 언어학 개론 시간에 교수님은 시니피에니 시니피앙이니 하는 생경한 단어를 언급해가며 현대 문법의 기초 개념을 설명하셨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그분의 강의는,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측면까지 있어서 강의가 끝날 즈음엔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지곤 했다.
그럴 때 교수님의 표정엔 늘 생기가 넘쳤다. 보통은 학생들의 질문에, 몰라서가 아니라 설명하려면 얘기가 길어져서 답하기 곤란할 때가 있는데, 교수님은 그럴 때조차 귀찮은 내색 없이, 마치 대학원 수업을 진행하듯 진지하게 관련 내용을 짚어 주시고, 앞으로의 과제까지 던져주셨다.
그러다 보면 예정된 강의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고, 강의실을 나올 때면 어학보다 문학에 관심이 있던 나조차도 진지하게 언어학을 공부해볼까 하는 마음이 동하곤 했다. 그만큼 교수님의 강의는 지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린 제자들의 마음을 전염시키는 힘이 있었다.
어느 가을, 민속학 교수님과 교수회관 언덕길을 오르던 일도 기억난다. 아마도 학보에 실을 원고를 받으러 가는 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성큼성큼 앞서 걷던 교수님은 학보사 수습기자였던 나에게 묻지도 않은 향후 답사 일정을 줄줄이 풀어놓으셨다.
만주와 몽골을 거쳐 시베리아까지 이어지는 샤머니즘의 원류를 찾아가는 루트였는데, 세세한 일정은 기억나지 않으나 무엇엔가 홀린 듯 열에 들뜬 교수님의 표정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교수님의 뒤꽁무니를 쫓아 종종거리며 계단을 오르던 나는 내심 의아했다.
도대체 무엇이 교수님의 마음에 불을 질러 적지 않은 나이에 ‘사서 고생’하며 시베리아까지 가게 만드는 것일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IMF와 함께 대학을 졸업했고, 언어학이나 민속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삶의 방향성을 잃을 때마다 두 분 교수님이 떠오르곤 했다. 그분들의 아우라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분들처럼 살고 싶었다. 내면의 밝은 빛이 외연까지 물들이는 사람으로.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열정이 다른 사람까지 전염시키는 사람으로.
처음엔 그것이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진 에너지라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거기서 재미를 찾고, 성취감을 얻을 때 내면에서 어떤 생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라 다른 사람까지 전염시키는 거라고. 하지만 거기엔 뭔가 더 본질적인 것이 있었다.
15년 가까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찾고,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일에 몰두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의 결과를 내려고 노력해도 좀처럼 거기에 가닿기는 어려웠다. 뭐가 부족한 걸까? 대체 무엇이 빠진 걸까? 내 안에는 차츰 결핍과 아쉬움이 쌓여갔다.
《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의 저자 리처드 브로디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하버드대학교를 다녔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소프트웨어 개발 부서에서 일했으며, 세계 최고 기업에서 1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어느 날 훌쩍 직장을 그만뒀다. 왜? 행복하지 않아서였다.
직장을 그만둔 그는 왜 자신이 그 많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아차렸고, 그것에 대답해주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내고 실천에 옮겨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은 갖지 못했다.”
비단 리처드 브로디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오류 속에서 썩 괜찮아 보이는 삶을 살아간다. 늘 좋은 성적을 받고 부모님께 칭찬을 받으며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평생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왔고, 또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사람들, 여전히 사회적인 성공과 명예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사람들.
그들에게 롤모델과 멘토의 성공 방정식은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반드시 새겨듣고 따라야 할 지침들이다. 리처드 브로디도 한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인 적이 있었다. 존경하는 롤모델처럼 되기 위해 그들과 똑같은 목표를 정하고, 그들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따랐던 적도 있었다.
그들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으므로 그도 자신만만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아무리 완벽하게 따라해도 늘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어찌어찌 비슷한 결과를 얻어도 그것이 온전한 자기 경험이 되지는 못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왜 그랬을까?
그는 그 원인을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데서 찾았다. 자신의 꿈을 자기 언어로 말하고 자기 방식대로 자기 삶을 창조하지 않고, 성공한 다른 사람들의 꿈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물론 사회가 정해놓은 조건과 잣대 속에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전혀 가치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문제는 평생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춰 살다 보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 충분히 생각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어진 내용을 암기하고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갖추게 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사회적 기대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리처드 브로디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 좋은 것이 무엇이며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들을 무작정 따라하기만 했다.”
그는 곧 방향이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보기에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진심으로 원했다. 그들은 자신이 성공한 분야에서만큼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그들의 자신감은 일부러 연출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었다. 그런 깨달음에 이르자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아하!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면 어떤 성취도 의미가 없구나.
글·전채연 ccyy74@naver.com | 일러스트레이션·양명진 artymj@naver.com